별 일 없이 산다 - 장기하와 얼굴들 1집


- TRACKS

1. 나와
2. 아무것도 없잖어
3. 오늘도 무사히
4. 정말 없었는지
5.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
6. 말하러 가는 길
7. 나를 받아주오
8. 그 남자 왜
9. 멱살 한 번 잡히십시다
10. 싸구려 커피
11. 달이 차오른다, 가자
12. 느리게 걷자
13. 별 일 없이 산다

1CD / 48:56 Mins / 레이블: 붕가붕가 레코드, 미러볼 뮤직


"잠깐만, 잠깐만. 내가 저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저 노래가...지금 세태를 풍자하는 느낌의 그런 곡이네."

"(그 말을 듣고 웃으며)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곡이지, 무슨..."

- '이하나의 페퍼민트'에서 크라잉넛의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해 '달이 차오른다, 가자'를 부르는 장기하와 얼굴들을 보고 곡의 느낌을 설명하신 아버지와 그 말씀을 듣고 웃는 누나의 말


2008년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 다녀온 기숙사 룸메이트 형이 이번 '쌈사페'는 왜 이러냐며 툴툴거렸다. 뭐가 그렇게 아쉬웠길래 오자마자 비난이냐고 물으니 좋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 전년도보다 많이 줄어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고 묻자, '많이' 라는 간결한 대답을 한 그 형은 그래도 재밌는 밴드가 있었다며 걔들이 쌈사페의 스타가 되어버렸다고 얘기했다. 그것이 장기하와 얼굴들… 공연 영상이 인터넷으로 퍼지고,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EBS 스페이스 공감'을 비롯한 방송 출연, '싸구려 커피'의 구성진 랩과 신비주의 코러스인 미미 시스터즈가 동참한 '달이 차오른다, 가자'의 촉수춤, 몇 곡 하지도 않았는데 1부 마지막 곡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싱글이 3,000장 넘게 팔릴 때 쯤..'장기하'는 폐인들의 집합소인 모 사이트의 합성 필수요소가 되어 가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이 표현, 장기하와 얼굴들에게 모욕적인 표현이 되려나.. 그냥 그렇다는 얘긴데 가카만 들어가면 의미가 이상해져 버려서..) 뉴스와 시사프로그램까지도 그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싱글은 마침내 판매량이 만 장을 넘어섰다. 

개인적으로 그나마 많이 들어보려고 노력하던 차에 08년 대중음악계에 대해서 좋은 의미로 놀라고 말았던 건 엄정화의 10집 앨범 <D.I.S.C.O.>와 태양의 솔로 앨범 <Hot>의 발매, 그리고 비의 <Rainism>에 'Love Story'가 수록됐다는 것과 장기하와 얼굴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인생 뭐 있나, 즐기자' 의 가사를 가진 노래로서는 엄정화의 이번 앨범이 정말 최고였는데 엄 여사는 빅뱅 멤버들과 적절하게 작업할 줄 알았고 샘플링할 곡을 잘 찾은 ‘D.I.S.C.O.'로 엄 여사는 9집인 <Prestige>와 다르게 화려하게 귀환했다. 태양같은 경우엔 '내가 바람펴도 넌 절대 피지마'의 실소가 터지는 가사가 있긴 했지만, '나만 바라봐'나 '기도'같은 곡들은 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세계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 보이고 비교를 하게 되지만, 어쨌건 그보다는 조금이나마 자신의 얼굴을 더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물론 YG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들이 더 생각나는 거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는….) 장기하 앨범 얘기하는데 왜 갑자기 엄정화와 태양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머리 속에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부터 쓰다보니 갑자기 저 두 사람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얘기할 거리가 별로 없는 현 대중음악계에서, 언제나 곡을 들으면 바다 건너, 아니면 지구 반대편의 나라의 음악들을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을 막아내고 그 공간에 다년간의 생산으로 쌓인 공력으로 만들어낸 매끈한 곡으로 자신들의 얼굴을 자신만만하게 각인시켰다. 비는 위의 저 노래 없었으면 이번 앨범 어쩔뻔 했나 싶고. 그 때 우리가 인디라고 부르는 그 곳에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그들의 음악'을 내놓으며 음악 페스티벌을 휩쓸었다. 그들도 말했다. 자신들의 노래도 '대중 가요'라고 생각한다고.

이미 인터넷에 퍼진 문제적 노래, 청년실업의 '4차원의 세계는 언제나 시작이다'의 자취방 사운드를 들을 때쯤엔 웬 귀물이 나왔나 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잊혀져 갈 때 들었던 '싸구려 커피'는 장기하와 얼굴들을 한 방에 머리속에 각인시켜 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곡이었다. 미미 시스터즈와의 퍼포먼스 때문도 아닌, 정말 그 곡 자체가 무시무시한 것, 일상을 소재로 한 곡은 많지만 사실 이 정도로 셸위구석투게더의 정서를 가진 노래는 없지 않았는가? ('연주도 아마추어의 느낌이 났기에 그 정서가 배가 됐다'라는 평가들도 많았는데, 꼭 그것 때문인 것 같진 않았다.) 노래는 적절히 돌아가는 맛도 있는 법인데 '싸구려 커피' 만큼은 우리가 느끼는 '할 일 없음'을 그대로 표출하고 궁상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줬다. 아, 이것이 장기하의 얼굴들의 음악세계인가? 언론은 불황인 음악계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등의 소개를 하며 <싸구려 커피> 싱글앨범을 만들고 있던 장기하의 모습을 담았다. 인디 레이블이고 동시에 '수공업 소형 음반'이었기에 CD 원판을 넣고 한 번에 일곱장씩 구워 (일곱장씩 구워내는 기계도 싱글의 히트 때문에 산 것이다.) 일일이 라벨을 붙이는 모습이 보여지고 장기하의 인터뷰가 추가로 보여졌다. 음악이야 좋으니까 소개되니 좋지만, 레이블과 장기하와 얼굴들이란 밴드를 비루함 그 자체로만 부각시켜 버리는 그 연출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했을까. 그것이 이 밴드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언론에게 대중음악의 정의는 무엇인걸까.  2월 말에 발매된 첫 정규앨범은 싱글 앨범과는 뭔가 많이 다르다. 앨범의 디자인은 근래에 발매된 한국 음악 앨범 중에서 적절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디지팩 케이스에 굉장히 아름다운 문자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며 가사가 포함되고 반복되는 패턴의 도형 디자인이 그려진 북클릿도 있다. 그리고 앨범의 제목도 있다. <별 일 없이 산다>. 정규앨범 발매기념 공연을 하루 앞둔 날에도 붕가붕가 레코드 사무실엔 브로콜리 너마저의 윤덕원과 인턴 사원 한 명이 <싸구려 커피>싱글을 손수 제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싱글이 여전히 불티나게 팔려서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은 내게 기묘한 느낌을 줬는데, 싱글로 공개된 노래들과 공연장에서 부른 노래들이 마침내 하나의 앨범이 됐을 때 마침내 '밴드의 음악이다'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싱글 앨범에서는 '6~70년대 한국 포크와 록 음악 밴드들을 연상케 한다'는 이들의 찬사를 느끼긴 힘들었다. 그러니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경우의 재미를 즐긴 셈인데 싱글에서는 할 일 없는 2008년의 일상적인 인간들의 궁상을 음악으로 볼 수 있었다. 공연장에서의 라이브 공연들은 아무래도 장기하와 얼굴들 특유의 퍼포먼스에 더 눈이 가기 마련이다. 언제나 옆에서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미미 시스터즈'와 코러스를 돕는 '목젖들', 그래서 이 스튜디오 앨범의 밴드 사운드는, 밴드이기 때문에 이런 사운드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형태의 음악적 표현이든, 가장 순수하고 내가 원하고 있었던 재미를 싱글보다 조금 더 나은 형태 (싱글 앨범은 '장기하의 앨범'으로 분류되곤 한다. '얼굴들'은 아니고.) 의 밴드 음악으로 제작되어 들을 수 있어서 반갑다. '나와'는 앨범의 시작을 여는 첫 곡으로서 손색이 없고 그들 음악의 독창성이 본격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2번트랙인 '아무것도 없잖어' 부터다. 그리고 입을 쫙쫙 크게 벌리며 노래를 부를 장기하의 얼굴이 상상될 정도로, 어떻게 보면 송창식을 연상시키는 그의 창법을 듣게 되면서 마침내 조금씩 대중음악의 황금기 시절의 음악적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이 앨범을 통해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됐다. 엄정화와 태양의 음악은 '본토'를 생각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기하의 앨범은 특이하게도 그들의 세계가 아닌, 청자에게 포크와 록, 아니면 포크 록의 빛나는 순간들과 그 근원들의 환영을 주마등처럼 지나가게 해 준다. '본토'의 음악을 말이다. 분명 그들은 현재 계속 유지되고 있는 밴드이고 그들의 음악은 지금을 다루고 있는데 묘한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는 거다. '아무것도 없잖어'는 송창식, '오늘도 무사히'는 명국환 선생의 '아리조나 카우보이'스러운 세계로 입문하면서 도입부 기타연주는 신중현의 느낌을 주고, '말 하러 가는 길'의 씁쓸함과 '나를 받아주오'의 해학적인 면은 산울림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남자 왜'로 오게 되면 우리가 앞에서 '연상'했던 것들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다고 장기하의 얼굴들의 첫 앨범이 그럼 한국음악사의 빛나는 순간들의 힘을 빌어 안전하게 음악세계에 안착했냐고 물으신다면 또 그건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가사들은 확실히 그들의 것이고 앞의 트랙들도 좋지만 특히 '나를 받아주오'부터 마지막 트랙인 '별 일 없이 산다'까지의 돌아가는 맛도 있고 직설적이기도 한 그 멋진 가사들과 멜로디는 이 밴드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과물이다. '별 일 없이 산다'를 보자. 이별하고도 그 사람을 그리워해서 다시 돌아와 달라거나 아니면 Cool하게 다른 이 만나서 잘 살아라 등의 천편일률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당당히 '네가 들으면 정말 배아파 죽을 소리겠지만, 나 별 일 없이 살고 있다. 아니, 사는 게 오히려 즐겁다.'라고 대놓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노래 (이런 노래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들 들어보면 뭔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고 부르는 듯 보였다.) 를 부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음악을 통해 다시 느끼는 한국대중음악의 빛나는 순간들의 경우엔, 지금 음악계에선 그것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 이 밴드가 대단한 이유이다. 음악 자체의 진실성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음악은 듣고 있으면 정말 진실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진실성이 뭔지 해명해 보라는 이유를 달아보기도 그렇다.) 자신의 개성과 음악사의 순간들까지 느끼게 하고 있으니까. 그건 그 ‘대중음악’의 음악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만의 에스프리가 있다. 장기하는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가사가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있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줬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하는 말을 했었다. 그렇다. 코러스의 이름을 목젖들이라고 소개하고 '느리게 걷자'를 부르면서 관객들을 향해 다이빙을 하는 것만 봐도 충분히 재밌지. 관객들을 즐겁게, 웃기게 해 주려는 노력이 눈에 보인다. 관객들은 즐거워했기 때문에 '웃기다'고 말하고 아티스트는 그 반응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가볍지 않은 가사를 가볍게 해주어 음악 듣는 것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고 자신들의 색깔을 드러내주어 참 좋다. 아, 참고로 앨범으로 발매된 곡들 중에서 싱글에 있는 곡들은 모두 재녹음 되어 보다 깔끔해졌고 한 번도 녹음되지 않았던 곡들은 이 앨범에 수록되기 위해 녹음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달이 차오른다, 가자'는 공연장에서 듣던 것보다 더 웅장하고(?) 박력이 넘치게 변했다. 궁금하지 않은가? 그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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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봤던 '나를 받아주오'는 중간에 미미 시스터즈가 비눗방울을 '자체제작'해서 날리는 게 인상깊었는데, 이게 공연장에선 담배를 피우는 것이더군요. 방송이라서 비눗방울로 교체했었나 봐요. 전 처음 알았네요.




아무것도 없잖어

터벅터벅 느릿느릿 황소를 타고 왔다네
푸른 초원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네
초원에 풀이 없어 소들이 비쩍 마를 때쯤
선지자가 나타나서 지팡이를 들어 "저 쪽으로 석 달을 가라"
풀이 가득 덮인 기름진 땅이 나온다길래 죽을 똥 살 똥 왔는데

여긴 아무 것도 없잖어

푸석한 모래밖에는 없잖어
풀은 한 포기도 없잖어
이건 뭐 완전히 속았잖어
되돌아갈 수도 없잖어

광채가 나는 눈을 가진 선지자의 입술 사이로
그 어떤 노래보다도 아름다운 음성이 "나를 믿으라"
머리를 조아린 다음 거친 가시밭길을 지나 꼬박 석 달을 왔지마는

아무 것도 없잖어

푸석한 모래밖에는 없잖어
풀은 한 포기도 없잖어
이거 뭐 완전히 속았잖어
소들은 굶어 죽게 생겼잖어
딱딱한 자갈밖에는 없잖어
먹을 거는 한 개도 없잖어
이건 뭐, 뭐가 없잖어
되돌아갈 수도 없잖어

by 홍준호 | 2009/03/08 13:19 | 음악 | 트랙백 | 덧글(0)

월-E - 앤드류 스탠튼


픽사의 전통답게 시작 전엔 언제나 단편 애니메이션이 나온다. 단편 애니메이션이 끝나면 본편이 시작된다. 픽사가 만든 작품의 배경 중에선 가장 황량한 배경일 것이다. 지구엔 쓰레기들만 가득 차 있고 700년 동안 묵묵히 지구를 청소한 로봇이 있다. 솔 바스 식의 타이틀 디자인이 볼만했던 <몬스터 주식회사>와 달리 조금 평범하게 작품의 제목이 뜬다. <월-E> 라는 제목이. 내가 픽사를 좋아하게 된 게 <인크레더블> 이후부터라서 뭐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만 또 이 천재집단에 대해 놀라게 되는 것이, '대사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간만에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전의 디즈니의 짤막한 3~40년대 애니메이션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거였는데 그나마 그 때의 애니메이션들은 슬랩스틱으로 음성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었다. <월-E>의 초반 30분 가까이 되는 분량엔 대사가 없다. 작품은 월-E의 캐릭터를 설명할 때, 오직 월-E의 큰 눈망울, 기계음, 슬랩스틱보다는 다른 행동의 비중을 높인다. 700년의 시간동안 살아남은 로봇은 월-E 뿐이다. 특이하게도 이 로봇은 스스로 수리할 줄 안다. 자신의 기계부품을 여럿 갖고 있으며 CPU까지 바꾸기도 한다. 자신에게 맞는 걸 찾고 더 좋은 것을 보고, 갖고 싶다는 욕구는 자기 자신을 고치면서 깨달았을 것이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에서 실사 화면이 등장해서 놀랐는데 월-E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MGM이 제작한 뮤지컬 영화 <헬로, 돌리!>다. 거기서 보여지는 인간들의 멋진 군무, 그리고 '손을 잡는다'는 행위, 지구에 생명체를 찾으러 내려온 로봇인 이브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월-E는 (강력한 파괴능력을 가진 이브가 무서워서 손을 못 잡지만) 이브와 수줍게 이름을 나누고 호기심 많은 이브에게 자신이 가진 물품들을 보여준다.

이브가 작동을 멈춘 뒤에야 손을 잡아보는 월-E의 모습에 많이 웃었지만 갑작스럽게 위기상황이 닥치고 우주로 따라나선 월-E의 모습엔 많이 놀랐다. (그런 전개가 될 줄 몰랐다.) 우주선이 도착한 곳은 엑시모 호, BnL 사의 우주선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선베드에 누워 버튼만 누를 뿐이지 스스로 뭔가를 하지 않아 비대해진 인간들의 모습이 보여진다. (<월-E> 가 개봉했을 때 보수 진영이 단체로 비난을 했다던데 Buy and Large 라는 회사 이름부터 이런 설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지간히 찔리나보다.) 너무 오래 그렇게 해 와서 스스로 뭘 해야할지 모르는 인간들은 월-E와 이브를 보고 스스로 뭔가 하는 법을 깨닫는다. <월-E>가 좋았던 것은, 로봇의 모든 행동들의 근원을 인간에게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적응력 하나는 타고나서 탈인 인간들을 일깨워주고, 월-E는 영화를 통해 '손을 잡는 것'이 얼마나 '로맨틱'한 것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다. 인간의 행위를 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에 정말 순수한 '로봇의 사랑'이라는 게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주에서 월-E와 이브가 사랑놀음을 하는 장면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게만. 그들은 애초에 인간이 되거나 하는 생각은 없다.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한다.

그런데 <월-E>는 다른 애니메이션과 다른 면모를 보이면서도 후반부는 예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의 후반부를 보는 듯 정형화된 전개를 보인다. 바로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오토'의 존재가 그것이다. 예전 디즈니 애니메이션엔 주인공의 모험이나 사랑이 계속 이어지다 후반부엔 꼭 거대한 악의 존재와의 대결이 자리잡고 있었다. <월-E>의 후반부가 그걸 생각나게 했는데, 좀 당황스러웠다. 왜냐면 픽사의 전작들이었던 <인크레더블>이나 <라따뚜이>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이 달라서 스타일의 차이가 있지만, <인크레더블>은 유사한 상황이 있는데도 악역 (솔직히 많이 불쌍한...) 인 신드롬에게 더 많이 동정심이 갔었고 그 놈의 빌어먹을 망토 때문에 곱게 못 죽은 신드롬을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더라. 절대적인 악의 존재가 아니었다. <라따뚜이>에도 위기상황이 닥치지만 심각하진 않다. 오히려 요리를 하는 대상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묻고 있었으며...그냥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그에 비하면 <월-E>는 신파에 가까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뻔히 보이지만....."아악, 안 돼!" 라고 외칠 비극적인 장면이 있다. ('안 돼!' 는 아니지만 보고 있는데 "아아!?" 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픽사와 앤드류 스탠튼은 누구와도 다른 참신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장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방식으로도 작품을 만들었다. 희한한 건, 그 어떤 인간보다도 이 로봇에게 감정몰입이 잘 됐고 너무나도 안타까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결국엔 행복하게 끝난다. 행복으로 가기 위한 극적인 장면은 바로 '손 잡기'다. 기계들이 서로 꼭 쥐고 있을 때, 토마스 뉴먼의 잔잔한 스코어가 삽입되는 그 장면은 정말 최고였다. 영향은 <헬로, 돌리!>에서 받았을지 모르나.....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 장면은 완전히 <월-E>의 것이다. 월-E와 아이팟....아니, 이브의 사랑이야기! (죄송해요. 요즘 아이팟 나노에 관심이 생겼어요.) 뻔하지만 동시에 뻔하지 않고, 그래서 눈물겹다. 아름답다. 대신 픽사의 차기작으로 노인이 주인공이라는 <Up>이란 작품에선 이런 식의 전개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P.S.1 -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디지털 상영관에서 처음 봤습니다. ...눈이 휘둥그레 해지더군요. 세상에... 이번에 관람은 더빙판으로 봤습니다. (디지털로 상영하는 게 자막이 아닌 더빙 뿐이었거든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볼 때마다 느끼는 겁니다만 원어보다 더빙이 더 좋더군요.

P.S.2 - 월-E가 우주로 나가는 장면은 굉장히 아름다웠는데요, 신기한 것이 우주의 배경이 마치 체슬리 보네스텔이 작업한 <스타워즈 에피소드 4: 새로운 희망>에 나왔던 우주 풍경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러니까...디지털 애니메이션인데 굉장히 아날로그의 느낌이 많이 났달까요? 기술의 발전이 살작 무서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디지털은 아무리 봐도 디지털인데 아날로그로 착각을 하는 순간이 생겼다니 말이죠.

P.S.3 - ....아이팟 나노, 괜찮을까요?

by 홍준호 | 2008/08/25 01:51 | 썩은 두 눈으로 본 영화나 만화 | 트랙백(1) | 덧글(2)

네크로맨틱

by 홍준호 | 2008/08/13 14:32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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